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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우리나라에 名연설이 없는 이유 (조선일보, 2014/5.9)2014-05-10

우리나라에 名연설이 없는 이유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한국통번역사협회장

 

통역대학원의 강의 교재는 주로 동시대의 각종 연설문이다. '통역'의 대상은 대부분 연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통역할 외국어 연설문은 찾기가 어렵지 않다. 영어는 인터넷의 여러 영어 사용 국가 사이트에 훌륭한 연설이 널려 있어 어떤 연설로 통역 연습을 할까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번에 네 번째로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만 하더라도 5개가 넘는, 그의 말대로 '섹시'한 연설을 남기고 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용산 미군 기지에서 한 연설은 통역하기에 신나는 '미군 통수권자'의 웅변이었다.

 

하지만 외국어로 통역할 우리말 연설은 찾기가 어렵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볼 수 있고, 총리실과 기획재정부 사이트에서 국무총리와 부총리의 연설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을 뿐 장관이나 그 많은 국회의원 연설은 어디에도 없다. 장관과 의원들이 어디선가 많은 연설을 할 텐데 기록으로 남는 것이 없다. 공기관이나 사기업의 대표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역사적으로 글을 중요시하고 말은 경시한 전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 언로가 막혀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자신이 한 말이나 연설을 기록으로 남길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현장에서 한 말이 두고두고 세인의 입방아 대상이 되기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우선 대통령 한 사람만 바라보는 공직자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자제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너는 뭐가 잘났냐?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듣기가 두려운 것이다. 공무원이든 국회의원이든 비리와 부조리에 연루되지 않은 이가 없는 만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말만 하고, 바른말을 했다 해도 기록으로 남기기는 꺼리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공직자의 연설은 다 그렇고 그런 의례적인 말이기에 통역하기가 오히려 힘들고 그럴 가치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내용이 없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에는 연설을 전문으로 작성하는 사람이 적다. 청와대에 주로 언론 출신의 문고 비서관이 몇 명 있을 뿐 "연설문을 써서 밥 먹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다. 선진국이나 각종 국제기구에서 나오는 연설을 오랜 세월 전문가가 써 온 경우와 다른 것이다.

 

지난달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정식으로 연설을 한 건 아니지만 이 발언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고 본다.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 부조리를 인정하고 뿌리 뽑겠다고 선언하면서 대통령의 입으로 '관(官)피아'나 공직 '철밥통' 이란 부끄러운 용어들까지 언급했다. 명연설은 진실과 진솔함이 담길 때 나온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번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각자가 정의롭지 못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나부터 뒤가 구리지 않은" 사람이 되어 진실이 담긴 발언을 시작하면 사회의 언로가 비로소 트이고 우리나라에도 수시로 명연설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 연설을 두고 제자들에게 통역 연습을 시켜보고 싶다.

 

2014.05.09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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